12月 7日 午後5時
Ahn Jongwoo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그림자/기억
안종우는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재료가 담긴 용기를 단독으로 일으켜 세워 화면의 중심부에 위치시켰다. 그것들은 대부분 투명한 병에 담긴 다양한 소스나 올리브, 혹은 스파게티가 담긴 종이박스 등의 소박한 존재들인데 작가는 그것들을 어느 날 특정한 시간대에 촬영한 후 특별한 피부막을 형성해 제시했다.
12월 7일 오후 5시라는 시간은 작가가 과거 거주하던 버지니아에서 1년 중 가장 그림자가 긴 시간이라고 한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 속에서 용기의 형태와 그림자는 적나라하게 제 몸을 드러낸다. 사물의 우측 바닥 면에 밀착해서 직선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수평띠를 만들면서 화면 바깥쪽으로 사라진다. 적막과 고독 속에 자리하고 있는 용기는 어두운 톤 속에서 흐릿해지면서 바닥에 자리한 그림자 밑으로 소멸하려는 듯하다.
그림자는 이중적인데 그것은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동시에 유한한 존재의 소멸성을 암시한다. 본래 17세기 서구에서 출현한 정물화 역시 바니타스나 메멘토모리의 메시지를 안겨주기 위한 연출이었다. 작가는 일상적이고 비근한 식료품 용기 하나를 재조명하고 기념비적으로 다루면서 그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 사라진 시간 등에 대해 발언한다. 이때 일상의 식료품들은 사유를 촉발시키고 해석을 독려하는 모종의 기호로 변용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단독의 사물은 자신의 표면을 정직하게 발설한다. 그러나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용기의 형태나 표면의 여러 디테일을 단순하게 문질러버리고 동질의 모습으로 환원되어 있다. 세부가 망각된 체, 소소한 사건들이 지워진 상태에서 그림자는 다만 용기가 서 있는 바닥에 평등하게 밀착되어있다. 그것은 마치 흐려진 기억과도 같다. 기억을 추동시킨 원본의 존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다만 기억인데 그 기억은 불충분하고 희박하고 희미해서 그림자와 같다. 사실 그림자는 부재하지만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존재, 아니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사는 유령 같은 것이다. 안종우는 자신의 사라진 시간을 기억하는 고리로 식료품 용기를 선택했다. 그것은 음식과 결부된 당시의 여러 추억을 불현듯 상기시켜주는 존재이지만 이미 망실된 시간의 것이기에 현재로 소환될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남은 것은 그림자와 같은 형해화된 기억 뿐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식료품 용기와 길게 자리한 그림자가 함께 한 장면을 촬영했다. 그리고 이를 흐릿하고 어두운 톤 속에 잠겨있듯이 보여준다. 마치 먹으로 그려진 그림 같기도 하다. 빛과 어둠만이 자리하는 곳에 특정 용기가 흐릿하고 모호하게 몸을 내민다.
작가는 검프린트 (Gum Bichromate)와 청사진(Cyanotype)에 한국화 매체인 분채, 아교, 장지 등을 혼합한 인쇄기법을 사용했다. 사진의 복제 기록방식과 회화적인 표면의 맛과 질감 등의 혼재하고 있는 이 작업은 기존 사진에 비하면 표면의 풍부한 변화와 질감, 물성 등이 두드러지고 한국화 작업에서 묘사되는 정물에 비하면 사물의 정확성이나 묘사의 핍진성에서의 강도가 앞선다. 재료 간의 충돌을 유도하여 이미지를 취약하게 만드는 한편 현상과정에서 형상을 부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기억과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빈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작가는 이를 통해 시간, 기억, 재현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진다. 표현방법의 확장과 다양함은 바로 그러한 질문 속에서 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객관적 방식으로 기록물을 포착, 재현하는 동시에 그 시각적 결과물을 독특한 방식으로 질감화, 물성화 하는 작업은 기존 사진을 확장하는 흥미로운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사진의 표현 확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검프린팅 기법을 이용한 작업 중에서 낯선 피부의 질감, 물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이 같은 사례는 드문 편이었다.
한편 일련의 반복되는 연속적인 사진 이미지를 통해 기억 그 자체를 바라보게도 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 무빙 이미지들은 앞서의 희박해진 형상들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작가가 가능한 의도를 담지 않고 본능적으로 바라본 기억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기록과 기억 속에서 소외된 모종의 영역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흥미로운 시도를 만나고 있다.
■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