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o the Corner
Son Eunah
서글픔이 주는 묘한 힘
손은아 / 골목에 들어가기(Into the Corner)낡고 오래된 사물들의 허물어지고 박락된 피부는 그것들이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남김없이 그대로 발설한다는 점에서 정직하고 그래서 당혹스럽기도 하다. 그 자리에는 모종의 알리바이가 없다. 구차한 변명의 밑자락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실 모든 존재는 시간 앞에서 잔인할 정도로 평등하다. 결국은 소멸과 부재로 종착될 텐데 그 부재를 부재로 알고 슬퍼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다. 유한한 인간은 늘 그러한 부재, 죽음, 망각을 애도하고 극복하거나 기억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미술의 역사가 또한 다르지 않다.
손은아는 도시의 후미진 골목길이나 문을 닫은 상가나 공장 건물, 혹은 오래되어 허물어지는 것들, 방치된 듯한 그 낡은 공간을 화면 안으로 호출 한다. 도시를 유랑하는 이의 시선에 걸려든 이 폐허의 이미지는 모종의 잔해들이자 사라지기 직전의 마지막 모습으로 겨우 남아있는 시신과도 같은 것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수습하고 애도하며 이를 기억하고자 그림으로 응고시킨다. 여기서 그림은 부재와 소멸, 죽음에 저항하는 나름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작가는 저 잔해의 이미지에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들을 또한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해 그림으로 고정시켰다. 아마도 오래된 것들, 오래 살아남아 너덜거리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에서 연민의 정이나 서글픔이 주는 묘한 힘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은 주어진 대상을 차분하게, 더욱 가라앉은 감성으로 재현하고 있다. 이 사실적인 그림에서의 재현기능은 낡은 존재의 피부가 간직한 흔적을 부감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 되는 셈이다. 살아남은 것들, 아직 연명하는 대상들의 피부는 그간의 시간이 덮쳐 문질러놓은 상처들로 처참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마모된 피부는 질긴 생명력의 표상이자 고난을 극복한 자랑스러운 상처들이라 서글픔 속에서 빛을 낸다. 작가는 인적이 부재한 공간을, 사물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회색 톤이 흐릿하게 퍼져 안개처럼 엉겨있는 느낌이다. 치밀한 세부묘사보다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색채로 누르면서 조율하고 있어서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사람은 사라지고 건물과 사물들만이 컴컴한 공간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칠이 벗겨진 담벼락과 전봇대와 전선, 벽면에 붙은 인쇄물과 낡은 간판, 비닐 천으로 포박되어 가려진 것들, 비좁은 골목길 등이 흐릿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불투명한 공기의 층을 감촉시키는 색채 구사로 인해 이 그림은 사실적인 재현이면서도 사실은 심리적인 풍경의 이미지에 해당한다. 특정 장소에서 환기되는 분위기, 정서를 극대화하는 풍경화인 셈이다.
사실 모든 그림은 작가의 주관적인 정서와 세계관을 통한 해석에 기인한다. 대상 자체를 지시하려는 즉물적인 차가운 재현과는 거리가 있는 이 풍경은-사실 그런 재현도 온전히 가능하지는 않지만-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특정 관점이 투사된 결과물이다. 너무 빠른 속도로 대체되고 재편되는 도시 공간, 자본주의 공간 속에서 효율성과 합리성의 이름 아래 마구 사라지는, 너무 이르게 죽어가는 대상에 대한 애도의 감정과 그것들을 쉽게 방기하거나 폐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간직하려는 욕망은 유한한 존재가 품고 있는 시간관과 함께 이른 소멸을 재촉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번 근작에서 가 가장 예리하게 다가왔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것을 보여주는 조형적인 구성이 단단하게 결합 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미 작가가 소재로 삼고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이미 매우 ‘쎈’ 것들이다. 그러나 그로인해 이런 유형의 그림은 자칫 소재주의화 되기 쉽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대상을 더 예리하게 추려내고 색채와 물감의 질료적 맛, 붓질이 쇠락하는 것들, 사라지려는 것들이 풍기는 체취 또한 건져 올리는 선에서 보다 단단해져야 한다.
■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